하나마키는 제법 멋들어진 서재로 꾸며놓은 한 지하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눅진한 양촛물을 뱉어내는 촛불 하나 말고 다른 빛은 없었다. 그는 촛불 단 한 자루의 빛에 의지해서도 백주대낮에 햇빛 아래서 책을 읽듯 선명하게 글자를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하나마키는 시력이 좋았다. 그것도 말이 안 되게 좋았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쿵. 하나마키의 등뒤에서 누군가...
#1. 카페 대학교 3학년 봄. 야치와 야치의 친구 A, B, C가 공강시간에 학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사이 새내기로 보이는 무리가 왁자지껄 즐겁게 떠들며 카페 앞을 지나간다. A : 풋풋하네. B : 그러네. 야치 :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C : 벌써 고학번이라니. B : (화들짝 놀라며 쏘아붙인다) 야! 고학번...
내가 있는 곳은 폭력이 진실인 세계. 처음 발을 담글 무렵만 해도 머뭇거렸지만 완전히 빠져드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느 세계든 폭력이 진실이며 다만 사소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양심이라 생각했던 것을 깨끗이 지워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양심도 폭력을 당하는 자의 자기위안이자 자기기만이며, 결국 폭력을 행하는 ...
"불 끌게." "응. 여기 열쇠." "고마워." 자율연습까지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는 길이었다. 언제나처럼 히나타와 카게야마가 마지막까지 남아 연습하고 야치는 둘의 연습을 도왔다. 배구의 ㅂ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니저가 된 야치도 여름방학을 지나면서 공을 올리는 데만큼은 도가 텄다. 히나타는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 히나타가 없으면 카게야마에게서는 유머가 사라진...
선배에게서는 초봄의 햇살같은 향기가 난다. 햇살같은 향기라니. 혼자 읽을 일기장에도 쓰기 민망한 단어다. 맡아본 적도 맡아볼 일도 없겠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상상하노라면 황홀해지고 아득해지는 향기다. 햇살같은 향기는, 그러니까, 햇살에 닿아 날아가는 이슬 향기기도 하고, 햇살에 젖어 피어나는 벚꽃 향기기도 하다. 설명하려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 같다. 그...
카라스노와 이나리자키의 오랜 분쟁은 무수한 피를 대가로 지불한 뒤 카라스노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제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뒤처리다. "이나리자키를 확실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재상 시미즈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이제 네코마를 비롯하여 도쿄 세력과의 실력다툼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일전에 보고된 바 몽골의 움직임...
금요일 아침연습은 다른 요일과 다를 바 없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받아!" 어제 연습을 마치고 저녁시간 내내 현이와 함께 부원들에게 줄 초콜릿을 만들었다. 엄마가 출장으로 집을 비워 현이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현이는 일본의 발렌타인 문화가 유별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초콜릿을 만들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핑계삼아 무언가를 만들고 노는...
"헤어져요." 당신한테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당신을 앞에 두고 태평하게 숫자를 센다. 세 번. 세 번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번, 대학교 1학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의외로 몇 번 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마음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는데 입밖에 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 당신...
온에게 사진들 보아하니 추석 잘 지낸 것 같아 기쁘다. 하나같이 배고파지는 사진들이라 괴롭긴 했지만... 우리 집도 나름대로 떡도 먹고 전도 먹었지만 식혜를 못 먹었어. 식혜 부럽더라. 아! 나도 모의고사 문제 풀어봤어. 많이 늦었지? 국어 94, 수학 80, 영어 97 이렇게 나왔어. 큰소리 탕탕 쳐놓고 너보다 10점이나 낮게 나왔네. 그래도 영어는 너보...
"...인데, 견학만이라도 와 보는 건 어때?" "네." "정말? 고마워! 그러면 방과후에 다시 올게!"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선배는 작은 손을 흔들며 복도 저쪽으로 멀어져갔다. 내가 혹시라도 금세 마음을 바꿀까 걱정되었나. 늦여름의 강렬한 햇빛에 선배의 샛노란 단발머리가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나는 물끄러미 손에 쥔 홍보 포스터를 들여다보았다. 카라스노 ...
"그러지 말고 나랑 밥 먹자, 히토카." 이 사람은 터무니없이 멋있다. 얼굴도, 키도, 몸테도, 목소리도, 옷맵시도, 심지어 땀냄새까지. "그래도 돼요? 감독님께 허락받은 거에요?" 사귄 지 몇 달이나 되어가는데도 이 사람을 대할 때마다 감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감이 아찔해진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다. 타이치 씨에게도 네코마 사람들에게도 들키기 싫다. 나...
"잘 이어줘." "잘 부탁해." 감히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만큼 대단한 부탁을 받으면 부담과 걱정으로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부탁에 부응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당장 그럴듯해 보여도 혹은 그렇지 않아도, 정말로 일이 어찌 되었는가는 나중에 돌아볼 때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진실은 늘 과거에 머물러 영영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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